1906년 5월 9일 내산면 지티서 1000여 의병 재결집…민종식 다시 의병장 추대
홍산·남포·광천 거쳐 열흘 만에 홍주성 점령…일제 군대와 치열한 항전
주민들의 역사 찾기에서 출발한 기념사업…지티의병기념공원으로 확대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등록…백제 역사에 가려졌던 부여의 항일 의병사 재조명
충남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 지금은 한적한 농촌마을이지만 120년 전인 1906년 봄, 이곳에는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한 차례 실패로 흩어졌던 홍주의병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일어선 곳이다. 1906년 5월 9일 지티에서 재봉기한 홍주의병은 홍산과 남포, 광천 등을 거쳐 열흘 뒤인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지티 봉기를 을사늑약 이후 일어난 대표적인 항일 구국운동 가운데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이용규가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1000여 명의 의병을 중심으로 지티에서 의진이 다시 구성됐으며, 이때 민종식이 의병장으로 재추대됐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그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 ‘홍주의병 지티봉기 기념공원’이다.
부여가 백제의 고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지티는 부여가 근대 항일의병사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을사늑약에 분노한 충청 유림…홍주의병 다시 일어서다
홍주의병의 역사는 지티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일어난 홍주의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주 지역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지휘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됐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의병운동은 다시 불붙었다.
안병찬·채광묵 등을 비롯한 인사들은 전 참판 민종식(1861~1917)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1906년 3월 예산 광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 진격을 시도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다시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였다.
그 장소가 당시 홍산 지역에 속했던 지티, 현재의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였다.
1906년 5월 9일 지티…1000여 의병 다시 집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06년 5월 9일 이용규가 전주·무주·여산·서천·남포 등지에서 모집한 1000여 명의 의병을 중심으로 지티에서 홍주의진이 재결성됐다.
민종식은 이곳에서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자료에는 당시 진용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민종식을 중심으로 선봉장 박영두, 중군장 정재호, 후군장 정해두 등이 지휘체계를 갖췄다.
이는 지티 봉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단순히 흩어진 의병 몇 사람이 다시 모인 것이 아니라 상당한 병력을 확보하고 지휘체계를 재편해 홍주성을 향한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나선 ‘재봉기’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정재호의 공훈기록에서도 홍산 지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으로 활동하고 홍주성 점령과 수성전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사료에 따라 지티 거사일을 양력과 음력으로 달리 표기한 사례가 있어 날짜를 인용할 때는 기준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티에서 홍주성까지…열흘간 이어진 진격
지티에서 다시 일어난 홍주의병은 곧바로 움직였다.
국가보훈부 자료에 따르면 의병은 홍산군 관아를 장악한 뒤 서천·비인·남포·광천·결성 등을 거쳐 북상했다. 그리고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지티에서 재봉기한 지 불과 열흘 만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재결성된 홍주의진이 홍산·남포·광천 등을 거쳐 홍주로 진격해 성을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각 지역 인사들이 의진에 합류하면서 병력과 조직도 확대됐다.
그러나 일제는 홍주성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성을 포위했다. 국가보훈부 기록에 따르면 5월 31일 새벽 총공격이 시작됐고, 우세한 화력으로 동문과 북문을 공격했다. 의병들은 시가전을 벌이며 맞섰지만 결국 성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훈부는 이 전투를 당시 대표적인 의병전투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의 희생도 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전투가 의병전쟁사에서 매우 큰 희생을 낸 전투였으며 이후 전국적인 의병항쟁 확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홍주의병의 역사에서 ‘부여 지티’가 중요한 이유
홍주의병이라는 명칭 때문에 그 역사가 오늘날의 홍성 지역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1906년 의병의 실제 활동 무대는 충남 서부권 여러 지역에 걸쳐 있었다. 특히 첫 봉기가 좌절된 뒤 의진을 다시 일으킨 곳이 현재 부여군 내산면 지티라는 점에서 부여는 홍주의병사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한다.
지티는 ‘실패한 의병이 다시 군대를 조직해 홍주성 점령으로 나아간 출발점’이라는 역사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부여 출신 의병의 참여도 확인된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는 부여 은산면 장벌리 출신 조병두가 토지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민종식 의진에 참여해 홍주성 공략에 나섰으며, 이후에도 이용규 등과 함께 홍산·부여·노성·연산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정부는 조병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따라서 지티봉기는 홍주의병의 역사인 동시에 부여지역 항일운동사의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주민들이 되찾아낸 역사…기념비에서 기념공원으로
하지만 지티의 역사적 의미가 오늘날처럼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역에서 지티봉기의 역사성을 알리고 기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기념사업이 추진됐고, 박정현 부여군수 재임시절인 2021년에는 홍주의병 지티봉기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후 단순히 기념비 한 기를 세워두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교육과 추모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지면서 기념공원 조성사업으로 확대됐다.
부여군의 건설공사 공개자료에도 ‘내산 지티봉기 기념공원 조성사업’이 공식 사업으로 확인된다.
충청남도가 소개한 지티의병기념공원은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 128-4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공원에는 지티봉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시설과 쉼터 등이 마련돼 방문객들이 의병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국가보훈부도 이곳을 독립운동 분야의 ‘의병운동’ 현충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홍주에서 끝나지 않은 의병정신
홍주의병의 의미는 1906년 홍주성 함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홍주의병이 다른 지역의 의병 봉기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인적·사상적 흐름이 1910년대 독립전쟁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 이후에도 살아남은 의병들은 다시 거사를 준비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일제의 탄압 역시 계속됐다.
그런 점에서 지티는 승리만을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다.
한 번 패하고 흩어진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 하나로 다시 모여 조직을 갖추고 싸움에 나섰던 ‘재기의 현장’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백제왕도 부여에 남은 또 하나의 역사
부여의 역사문화유산을 이야기하면 흔히 백제부터 떠올린다. 부소산성과 관북리유적,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등 백제왕도의 흔적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대표한다.
그러나 내산면 지티에 남은 의병의 역사는 부여의 시간이 고대 백제에서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06년 봄 이름 없는 의병들이 산길을 넘어 지티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다시 의병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홍산에서 홍주까지 진격해 일본군과 맞섰다.
1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는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티의병기념공원의 가치는 규모보다 그 땅이 간직한 기억에 있다. 백제의 고도 부여에 구한말 국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또 하나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잊혀가던 역사를 다시 찾아 기념의 공간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지티에서 다시 올랐던 의병의 깃발은 결국 홍주성에서 내려왔지만, 그들이 남긴 항일의 정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늘 지티의병기념공원이 기억하려는 것도 바로 그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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