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문화아파트 숲에서 만난 280년의 시간

아파트 숲에서 만난 280년의 시간

어서각과 오래된 은행나무가 들려주는 세종의 진짜 역사

세종은 늘 새로운 도시로 소개된다. 정부청사가 들어서고, 아파트가 솟아오르고, 넓은 도로가 도시를 가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젊은 도시라는 수식어도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화려한 신도시의 풍경 한가운데에는 누구보다 오래된 시간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세종 어서각
세종 아파트 속 어서각(사진=김영진 기자)

내가 살고 있는 아름동 아파트 바로 옆 숲에는 ‘어서각’이 있다. 그 곁에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은 은행나무도 서 있다. 매일 산책하며 마주치는 풍경이지만, 발걸음을 조금만 늦추면 그곳은 신도시가 아니라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입구가 된다.

세종 어서각
세종 어서각(사진=김영진 기자)

어서각은 영조 20년인 1744년에 세워졌다. 태조 이성계가 강순룡에게 내린 교지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전각이다. 영조는 후손들이 교지를 소중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어서각(御書閣)’이라는 이름을 써 내려 보냈다. 이후 정조와 고종의 어필까지 더해지면서 이 작은 전각은 한 가문의 이야기를 넘어 왕조의 기억을 품은 공간이 되었다.

세종 어서각
세종 어서각(사진=김영진 기자)
세종 어서각
세종 어서각(사진=김영진 기자)
세종 어서각
세종 어서각(사진=김영진 기자)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말, 목이 마른 이성계에게 강순용의 여동생이 물 한 바가지를 건넸다고 한다. 하지만 물 위에는 버들잎이 띄워져 있었다. 급하게 들이켜다 탈이 나지 않도록 천천히 마시라는 배려였다.

이성계와 신덕왕후 설화
이성계와 성후 현비 설화(AI생성 삽화)

조선을 세운 뒤에도 이성계는 그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았고, 그녀를 성후 현비에 책봉하고 강씨 집안에도 교지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는 왕건과 장화왕후의 설화를 배낀 듯 한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과 함께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마음이 오롯이 남아 있다.

세종 어서각 옆 은행나무
세종 어서각 옆 은행나무

어서각 앞 은행나무는 또 다른 역사의 증인이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계절마다 다른 빛을 보여준다. 봄에는 연둣빛 새잎을 틔우고, 여름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 나무는 정부청사가 생기기 전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도 이곳을 지켜본 살아 있는 시간이다.

세종시는 계획도시다. 그래서 종종 ‘역사가 없는 도시’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절반만 맞다. 행정수도는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이 땅의 역사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어서각과 은행나무는 그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점은 이 문화유산이 거대한 관광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학교를 오가며 그 앞을 지나고, 주민들은 반려견과 산책을 하며 나무 아래를 걷는다.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역사는 우리의 삶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도시는 건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과 이야기가 켜켜이 쌓일 때 비로소 한 도시의 품격이 만들어진다. 세종이 행정수도로 성장하는 지금, 어서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우리 곁에 있는 역사를 돌아보고 있는가.

오늘도 나는 산책길에서 어서각 앞을 지난다. 수백 년 전 왕의 글씨를 품은 작은 전각과 묵묵히 계절을 견디는 은행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때로 긴 설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빠르게 변하는 도시일수록 오래된 시간이 더욱 소중한 이유도 바로 그곳에 있다.

김영진 기자
김영진 기자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20년간 국가기관의 문화콘텐츠 기획과 제작을 수행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부와 국립박물관단지 관련 업무를 수행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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