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문화 1,500년 침묵 흐르는 금강의 겨울… 공산성, 백제의 숨결을 걷다

[여행] 1,500년 침묵 흐르는 금강의 겨울… 공산성, 백제의 숨결을 걷다

화려한 봄꽃 걷어낸 자리에 남은 역사의 뼈대, 겨울 공산성 성곽길을 걷다

차가운 강바람 맞으며 마주한 웅진 백제의 찬란하고도 서글픈 시간

겨울 여행의 묘미는 ‘비움’에 있다. 봄의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본질뿐이다. 지난 24일, 충남 부여에서의 일을 마치고 차로 30분을 달려 웅진 백제의 심장, 공주(公州) 공산성(공산성)을 찾았다. 영하의 기온 속, 금강에서 불어오는 날 선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깨웠다.

공산성 설경(사진=충청남도)
공산성 설경(사진=충청남도)
눈내린 공산성과 금강신관공원 사이로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사진=공주시)
눈내린 공산성과 금강신관공원 사이로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사진=공주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은 백제가 한성(서울)을 내어주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던 475년부터 부여로 떠난 538년까지, 왕조의 가장 절박하면서도 역동적이었던 시기를 지켜낸 산성이다. 겨울의 공산성은 그 어느 계절보다 성곽의 ‘선(線)’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 사이로 2.6km에 달하는 성벽이 산의 능선을 따라 용처럼 굽이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 따라 걷는 길, 과거와 현재의 경계

금서루(비단문)를 지나 성곽길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오른쪽으로는 공주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겨울 금강의 물빛은 깊고 푸르다. 강 건너 신관동의 아파트 숲이 현대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발밑에 밟히는 흙과 돌은 1,500년 전 백제인의 숨결이다.

특히 공북루에서 만하루로 이어지는 강변 성곽길은 겨울 공산성 트레킹의 백미다. 강바람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는 구간이지만, 그만큼 탁 트인 시야를 선사한다. 꽁꽁 얼어붙은 강가에 내려앉은 겨울 철새들의 군무는 고요한 성곽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백제 부흥 운동의 치열했던 함성은 사라지고, 오직 바람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이 남는 고독한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된다.

왕궁지에서 만나는 웅진의 꿈

성곽 안쪽의 넓은 평지, 추정 왕궁지에는 겨울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화려했던 전각들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지만, 오히려 그 여백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령왕이 다시금 강국(强國)으로 도약하기 위해 고민했을 밤들과, 멸망의 순간 의자왕이 겪었을 회한이 텅 빈 공간에 서려 있는 듯하다.

겨울 해는 짧다. 성곽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든다. 금강에 비친 노을과 성곽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면, 공산성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빛나는 황금빛 성벽은 마치 다시 부활한 백제의 영광을 웅변하는 듯하다.

화려한 볼거리를 좇는 여행이 아니라, 역사의 깊이와 자연의 적막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지금 공산성으로 가라. 그곳에 웅진 백제의 겨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스토리스팟(강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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