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기교보다 재료 본연의 힘으로 승부하는 내공의 현장
행정수도 세종의 입맛도 사로잡은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의 ‘오래된 미래’
음식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관계의 깊이를 더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다. 26일 점심,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생활하는 20년 지기 벗이 충남 부여군을 찾았다. 행정수도로서 날로 비대해지는 세종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뒤로하고,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까지 찾아온 손님에게 무엇을 대접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부여읍 주민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중식당, ‘제일관’이었다.



지역민이 인정하지 않는 맛집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다.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곳과 현지인들이 슬리퍼를 끌고 찾는 곳의 차이는 ‘지속성’에 있다. 제일관은 후자에 속한다. 이곳의 짬뽕은 단순한 한 끼 식사를 넘어 부여라는 지역사회의 입맛을 지탱해 온 하나의 ‘문화적 자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 바다 위로 솟은 홍합의 산, 시각을 압도하다
주문한 짬뽕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세종에서 온 벗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놓인 그릇은 그 자체로 풍성함의 상징이었다. 짙고 붉은 국물 위로 검은 빛깔의 홍합이 산처럼 쌓여 있고, 그 사이로 불에 그을린 양파와 배추, 그리고 오징어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요즘 유행하는 프랜차이즈 짬뽕들이 캡사이신을 쏟아부어 고통스러운 매운맛을 경쟁하듯 내세울 때, 제일관은 ‘정도(正道)’를 걷는다. 국물 한 숟가락을 뜨니 묵직한 바디감이 입안을 채운다. 맵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해산물에서 우러나온 시원함과 채소를 센 불에 볶아낼 때 입혀진 은근한 불향(Wok Hei)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수십 년간 웍(Wok)을 잡아온 주방장의 내공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기본에 충실한 ‘반찬의 미학’, 맛의 완성을 돕다
화려한 요리일수록 곁들임은 단순해야 한다. 제일관의 밑반찬은 단무지, 양파, 춘장, 그리고 김치로 구성된다. 이 단순한 구성이 짬뽕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완벽한 조연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적당히 익은 김치는 자칫 기름질 수 있는 중식의 뒷맛을 깔끔하게 잡아주는 ‘신의 한 수’다.
세종시의 세련된 다이닝에 익숙해져 있던 벗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세종에서는 맛보기 힘든 ‘진짜’의 맛이다. 건물이 낡고 화려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국물 한 모금에 알겠다.” 그의 평가는 정확했다. 제일관은 인테리어로 눈을 현혹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맛으로 승부하는 ‘진검승부’의 장이다.
지역과 사람을 잇는 식탁
식사를 마칠 때쯤 식당 안은 점심을 해결하러 온 인근 직장인들과 주민들로 가득 찼다. 서로 안부를 묻고, 짬뽕 그릇을 비우며 하루의 에너지를 얻는 모습. 이것이 바로 지방 소도시가 가진 생명력이다. 친구와 나눈 한 그릇의 짬뽕은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 부여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넉넉한 인심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제일관의 짬뽕은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매일 똑같은 맛을 내는 그 성실함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냈던 ‘맛의 본질’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