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농업농업 "연봉 200만원에서 1만 5천평 대농이 되기까지"… 친구 윤태의 귀농 '생존 일지'

[사람 속으로] “연봉 200만원에서 1만 5천평 대농이 되기까지”… 친구 윤태의 귀농 ‘생존 일지’

홍산농고 토목과 친구, 55세 농사꾼 이윤태와의 대화

트랙터 할부금 갚느라 분유 값도 없던 시절… “신용은 칼”이라는 신념으로 버텨

트랜스로 측량하고 도면을 그리던 친구, 고향 부여에서 ‘딸기’로 일구다.

인생은 참 묘한 함수다. 홍산농고 토목과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함께 측량기를 들여다보던 두 친구가 있었다. 한 명은 도면을 그리다 컴퓨터 언어에 매료되어 대전에서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렸고, 다른 한 명은 일찌감치 고향 흙으로 돌아와 진천에서 중고 파이프를 구입해 1,200평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이윤태 친구가 28년 청춘을 바쳐 일궈낸 부여군 옥산면의 딸기 농장 전경
이윤태 친구가 28년 청춘을 바쳐 일궈낸 부여군 옥산면의 딸기 농장 전경
탐스럽게 익은 딸기가 영롱한 붉은 빛을 뽐내고 있다.
탐스럽게 익은 딸기가 영롱한 붉은 빛을 뽐내고 있다.
허리를 굽혀 딸기 잎사귀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
허리를 굽혀 딸기 잎사귀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

내가 2008년, 대전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 부여로 돌아왔을 때, 친구 이윤태(55)는 이미 베테랑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27일 오후, 부여군 옥산면의 딸기 농장에서 28년 차 농부이자 나의 오랜 벗인 그를 만났다. 나름 성공한 사람의 현재는 화려하지만, 그가 털어놓은 ‘진짜 농사 이야기’는 낭만이 쏙 빠진, 처절한 생존기였다.

딸기 하우스 한가운데 선 그의 눈빛에서 지난 세월 모진 풍파를 견뎌낸 농사꾼의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빚 갚고 나면 통장엔 200만 원그래도 신용하나로 버텼다

그는 현재 1만 5,000평의 농지 위에서 농사를 짓는 나름 지역의 손꼽히는 대농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 털어놓은 숫자는 충격적이었다. “200만 원.” 귀농 후 12년 까지, 그가 1년 동안 3시간도 못자며 죽어라 일해서 손에 쥔 연봉이었다.

윤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시절 직장생활을 접고 총각의 몸으로 맨주먹으로 부여에 내려왔다. 1,200평의 땅을 임대해 딸기 농사일을 시작했다. 부여에 내려온 5년 후 지금의 아내와 가정을 꾸렸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둘째 형이 나한테 물었어. 너 1년에 얼마나 버냐고. 내가 계산해 보니 딱 200만원 남더라. 딸기 판 돈 들어오면 비닐 값, 박스 값, 농자재 외상값부터 갚았으니까.“

그를 지탱한 건 ‘신용’이었다. 그는 빚을 내 중고 트랙터를 샀다. 남의 밭을 갈아주고 받은 돈(임작업비)으로 할부금을 갚고 생활비를 댔다. “약속은 칼이야. 농가하고 ‘몇 시에 갈아주겠다’ 하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갔다. 3일 밤을 새워서라도 그 시간은 지켰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찾더라.” 끼니는 거를지언정 빚은 남기지 않겠다는 그 미련한 고집이 지금의 이윤태를 만든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토목에서 갈라진 두 길, 흙 위에서 다시 만나다

“너는 컴퓨터로 세상을 짓고 살았지만, 나는 이 땅에다 내 인생을 지었다.” 하우스 안에서 만난 윤태가 건넨 첫마디였다. 우리는 동갑내기 55세. 나는 설계사무소를 거쳐 프로그래머로 살다 18년 전 귀향했고, 그는 그보다 훨씬 앞서 28년 전부터 이곳을 지켰다.

윤태는 “토목과 나와서 배운 측량 기술이 농사에도 쓰이더라”며 웃었다. 밭이랑을 줄 맞춰 세우고, 배수로의 기울기를 잡을 때마다 그는 고교 시절 실습 시간을 떠올렸다고 했다. 내가 0과 1의 디지털 세계에서 버그와 씨름할 때, 그는 냉해나 병충해 같은 자연의 변수와 싸우고 있었다.

프로그래밍은 수정 할 수 있지만, 농사는 되돌릴 수 없더라

윤태의 지난 28년은 순탄치 않았다. 귀농 초기, 경험 부족으로 한 해 농사를 망쳤을 때의 절망감은 내 프로그램 코드가 엉켰을 때의 막막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였다. “너는 코드 한 줄 지우고 다시 짜면 되지만, 농사는 한번 때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하잖냐. 그 기다림이 사람을 철들게 하더라.“

그는 초창기, 마스크 살 돈도 아까워 맨몸으로 농약을 뿌렸다. 좁은 딸기 고랑을 오리걸음으로 다니며 하루 15시간씩 일했다. “그때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살충제 가루 다 마셔가며 일했어. 답답해서 마스크도 안 썼지. 지금? 눈 침침하지, 허리 디스크 왔지. 몸이 성한 데가 없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농사가 잘되니까 땅은 늘어나는데, 내 몸은 반대로 줄어들더라. 1만 5,000평 농토는 내 건강하고 맞바꾼 거야.“

등록금 고지서와 딸기 상자의 무게

그에게 ‘농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거친 밭을 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삼 남매를 길러내는 일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 그리고 이미 대학에 보낸 두 자녀까지. 아이들을 키워낸 힘의 원천은 오롯이 이 붉은 딸기밭이었다.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오는 달이면, 새벽잠이 절로 달아나곤 했다고 회상했다. 딸기 한 상자, 한 상자가 곧 아이들 책값이자 밥값이었으니까.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아이들이 ‘아빠 고생하셨어요’ 하며 대학 성적표를 내밀 때의 그 벅찬 기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딸기 농사보다 자식 농사가 더 힘들더라. 딸기는 정성을 쏟으면 쏟는 대로 답을 주는데,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웃음).” 그래도 아직까지 아이들이 착하고 바르게 커서 마음이 뿌듯하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경영자로의 전환, 그리고 친구와의 재회

죽도록 일만 하던 ‘노동자 이윤태’는 이제 ‘경영자 이윤태’로 변모했다. 무일푼으로 도와 주셨던 어머니께서 연로해져 현장을 떠나면서 그는 고용농으로 시스템을 바꿨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고용하고, 자신은 전체적인 작황 관리와 유통, 경영에 집중했다. “직접 쪼그려 앉아 일할 때보다 몸은 편해졌지만, 책임감은 더 커졌어. 이제는 내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내가 2008년 부여로 내려왔을 때, 윤태는 가장 반갑게 맞아준 친구 중 하나였다. 도시의 속도에 지쳐있던 나에게 묵묵히 제철 딸기를 내어주던 그의 모습은 큰 위로였다. “네가 다시 부여로 왔을 때 참 좋았다. 각자 다른 길을 돌고 돌아 결국은 고향 친구로 늙어가는 게 인생 아니겠냐.“

이제 쉰다섯. 그는 서부여 지역에서 인정받는 딸기 농군이 되었고, 나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기자가 되었다. 하우스 안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딸기를 보며 생각했다. 친구는 단순히 작물을 키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청춘을 붙잡고 단단한 중년의 삶을 완성해 낸 것이라고.

대화를 마치며 친구는 말한다. “야, 친구야.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 무식하게 버텼으니까 우리 삼 남매 저만큼 키웠고, 이 땅 지켰지. 안 그러냐?“

윤태가 갓 딴 딸기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먹어봐라. 이게 내 28년 청춘이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끝에, 뭉클한 땀 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부여의 흙바람 속에 서 있는 55세 농부 이윤태. 그의 망가진 허리와 흐릿해진 눈은 부끄러운 상처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낸 가장의 위대한 훈장임이 분명했다.

나 혼자 잘사는 건 재미없지마을의 일꾼으로 거듭나다

죽도록 일만 하던 ‘일벌레’ 윤태는 이제 지역 사회를 위해 땀 흘리는 ‘일꾼’이 되었다. 현재 그는 ‘서부여 싱싱딸기 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역 딸기 농가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부여군농업회의소 옥산면 회장’으로서 농정 현안을 챙기는가 하면, 자신이 사는 ‘옥산면 가덕2리 이장’직까지 맡아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옛날엔 내 자식 밥 먹이는 게 급해서 앞만 보고 달렸는데, 이제 주변이 보이더라. 나 믿고 농사짓는 회원들, 우리 동네 어르신들 챙기는 게 이제 내 진짜 농사야.” 자신의 영농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고, 마을 대소사를 챙기며 봉사하는 시간. 그것은 그가 28년간 흙에서 배운 ‘나눔의 철학’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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